그 때 그 학생 최영도  (Homepage) 2025-03-16(일) 17:22:54, 354

1986년 3월, 그 해는 부산 모여자고등학교에서 3학년 12학급 전체 학생들의 체육 수업을 담당하게 된 해로 기억된다. 그 당시 컴퓨터로 시간표를 작성할 때가 아니어서 첫 주에는 임시 시간표로 운영되다가 여러가지 상황들을 체크해 본 후 교과 담당교사의 서명 확인을 받은 후, 다시 본 시간표를 작성하여 둘째 주부터 본 시간표대로 수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. 시간표 담당 선생님께서 전해주고 간 시간표를 받아보니 1학년과 2학년은 정상적으로 주 당 체육 2시간과 무용 1시간 씩 총 3시간으로 시간표가 바르게 작성되어 있었는데, 3학년의 경우 최소 2 시간은 배정하여 3 년 간 16단위에서 18단위의 체육 수업을 하도록 작성되어야 하는데 3학년은 1 시간 씩 총 12시간의 수업이 배정되어 있었다. 시간표 담당 선생님께 시간표가 잘못 작성된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가져오면 사인해 드리겠다고 전해주었다. 잠시 후 교무주임(요즘 명칭 - 교무기획부장)께서 시간표를 갖고 와서 바르게 작성된 시간표가 맞으니 서명을 해 달라고 했다. 제가 알기로는 잘못 작성된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오라며 사인을 해주지 않자 교장실로 같이 내려가자고 했다. 교장실에 갔더니 체육 주임까지 내려오라고 연락을 하더니 지금 이 3학년 학생들은 1~2학년 때 이미 14단위 수업을 받았으니 이번 3학년 1년 간은 주 당 1 시간 씩 체육 수업을 받는 것이 맞다고 우기셨다. 저는 이번 3 학년 학생들이 1~2학년 때 받은 수업 시간을 알고 있다며 교육청에 제가 직접 문의하여 제가 잘못되었으면 사인을 해주겠다고 말씀 드리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3학년 체육 수업을 정상적으로 작성해 주었다.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후 몇몇 주임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들이 한 잔 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우리 학교에 올 해 인문계 실정을 모르는 새끼가 한 놈 있어 문제라고 뒷담화를 나눈다는 얘기를 종종 전해 듣게 되었다. 그러나 그런 말에 굴하지 않고 학생들과 의논하여 3학년 학생들만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바로 식사를 하지 않고 5 분 짜리 경쾌한 음악을 편집하여 음악에 맞춰 운동장을 몇 바퀴 가볍게 뛰고 난 후 식사를 하는 에어로빅 중간 달리기까지 실시하였다. `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.`더니 인문계 실정 모르는 새끼 하나가 온 학교를 다 망친다고 얘기하고 다닌 다지만 나에게 직접 의논하지 못하는 그 분들이 차라리 나에게 직접 말씀해주시면 내 생각도 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나도 덩달아 그 분들을 욕하고 다니지는 않았다........ 그렇게 1년이 지난 그 해 연말 우리 3학년 학생 한 명이 학력 고사 부산 최고 점수를 받았고, 학년 말 진학 성적은 그 앞 해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월등히 좋았다. 인문계 실정을 모르는 한 새끼에 관한 욕이 명분을 잃게 되어 잠잠해져 갈 때 쯤인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, 의논할 일이 있으니 학교로 좀 나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. 학교로 달려 가보니 교장실에 몇몇 주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. 자리에 앉으며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물어보니 이 번에 학력고사 부산 1등을 한 000 때문에 의논 드린다고 얘기를 꺼내셨다. 그 학생이 체육을 제외한 전 과목의 성적에서 `수`를 받았는데 체육 성적만 `수`를 받지 못해 내신 성적이 1등이 아니라서 우리 내규상 졸업식장에서 1등에게 주어질 학교장 상을 다른 학생에게 줄 수 밖에 없어 선생님께서 000의 성적을 고쳐서 `수`로 해주시면 고맙겠다는 말이었다. 하도 어이가 없어 싱긋이 웃으며 말씀드렸다. 그 아이는 다른 공부는 다 잘해도 운동은 잘 못한다는 사실을 본인과 전체 학생이 다 알고 있고, 그래서 `수`를 못 받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데 그 성적을 고쳐서 불법으로 그 학생에게 학교장 상을 수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? 차라리 그 학생에게 학교의 명예를 빛내 주었다며 다른 특별상을 하나 만들어 수여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? 하도 같잖아서 그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마음대로 하시라고 전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. 그 학생은 졸업식 때 학교장 상은 받지 못했고, 서울법대에 입학하였고, 그리고 몇 년 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고, 십 몇년 전엔 대법원에 근무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. 작년 12월 3일, 이 정부가 자칭 계몽령이라 부르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, 그 다음날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다. 이번에 `대통령 탄핵 소추안`을 심리할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? 헌재 재판관들을 살펴보니 그 때 체육 점수가 `수`가 아니라서 학교장 상을 받지 못했던 그 000가 헌재 재판관이 되어 있었다. 나의 `원리원칙주의` 때문에 자신이 학교장 상을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누가 알려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친구는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? 기각일까? 인용일까? 나라의 운명보다는 그 때 그 학생의 선택이 더 기다려진다! 그 학생의 이번 결정을 통해 그 동안 그 학생이 살아온 시간들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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